부산! 명소가 많아도 너무 많다. 한정된 시간에 빡빡하게 일정을 짜다 보니 자꾸만 욕심이 생긴다. 부산역을 빠져나온 여행자라면 곧장 길을 건너 영화 ‘올드보이’의 배경 ‘장성향’ 또는 ‘범죄와의 전쟁’, ‘신세계’ 촬영지로 유명한 ‘화국반점’에서 요기를 하자. 그리고 부산의 역사가 스민 산복도로(山腹道路)에서 여정을 시작해 보자. 발아래 펼쳐지는 시원한 부산 풍경을 감상하며 짭조름한 바다 냄새 스민 골목을 쏘다니다 보면 금세 여정이 정리될지 모를 일이다.
부산의 역사를 압축해 보여주는 공간으로 산복도로만 한 곳도 없다. 경사지를 따라 빼곡히 들어선 가옥은 마치 피난민의 남루했던 삶과 부두노동자의 고단했던 하루가 빚어낸 하나의 예술작품 같아 보인다. 1960년대 중반 이 달동네를 가로지르는 도로가 만들어지는데, 사람들은 굽이치는 가파른 길 위를 달리는 버스 위에 몸을 싣고 학교로, 일터로 향했다. 점점 번듯한 집들이 들어서고 그렇게 동네는 변화를 맞는다. 민주공원으로 올라가는 길 중턱에 있는 ‘역사의 디오라마(Diorama)’는 이런 부산의 과거를 미적으로 풀어낸 공간이다. 이곳에는 관조, 남고(覽古), 응시, 전망 등 4가지 테마로 구성된 건축물이 들어서 있다. 거기엔 부산의 자연과 문화 그리고 근대역사를 관통해 미래로 가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다. 그 의지는 발치 아래 펼쳐진 푸른 바다 조망과 어우러지며 완성된다. 역사의 디오라마에서 이어진 길을 따라 오르면 민주공원에 이른다. 산꼭대기 작은 조각공원 주변으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다. 장기, 바둑으로 여가를 보내는 장면이다.
어깨너머로 사뭇 진지한 한 판을 구경하고 조각공원 옆 출구로 나오면 북카페 ‘밀다원시대’에 닿는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에 피난 온 예술인들은 ‘밀다원 다방’을 아지트처럼 썼는데 김동리는 1955년 이 다방에 모인 예술인의 갈등과 삶을 ‘밀다원시대’란 제목의 소설로 그려낸 바 있다. 이를 모티브로 해 만들어진 카페가 바로 이곳인데 최근에는 ‘뷰 맛집’으로 입소문이 나고 있다. 통유리 앞에 자리를 잡고 커피를 마시며 멈춰 있는 듯 느릿느릿 바다 위를 부유하는 배들을 감상하는 건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커피에 음악이 빠질 수 있나. 카페를 나와 곧장 직진하면 얼마 못가 ‘금수현의 음악살롱’이 나온다. 지휘자 금난새의 아버지인 그는 경남 김해 출신으로 오랫동안 부산에서 교편을 잡고 후학을 양성한 교육자이자 음악가였다. 금수현(1919)은 음악시간에 한 번쯤 불러보았을 법한 가곡 ‘그네’의 작곡가인데, 이 노래는 1947년 어느 일요일 그의 장모였던 ‘김말봉’의 시를 읽은 선생이 모시한복 입은 여인이 평화롭게 그네를 타는 듯한 곡상이 떠올라 15분 만에 완성했다는 일화가 있다.
금수현은 1945년 광복을 맞자 조선독립만세 행진 때 널리 불렸던 ‘새노래’를, 이듬해 ‘8월 15일’ 노래를 작곡했다. 이후에는 음악 관련 간행물 등을 꾸준히 발간하며 우리나라 음악 발전에 기여한다. 이렇듯 마치 작은 음악 작업실처럼 꾸며진 ‘금수현의 음악살롱’에선 음악계에 한 획을 그은 그의 발자취를 천천히 더듬어 볼 수 있다. 특히 바로 앞 ‘대청 SKY 전망대’에서는 신선대, 부산항대교, 해양대, 영도 봉래산, 용두산공원 부산타워가 파노라마처럼 흘러간다. 이런 풍경은 산복도로라고 쉽게 만날 수 있는 장면이 아니다. 푸르름의 향연 앞에 넋을 놓기 딱 좋은 장소가 바로 이곳인 셈이다.
길은 전망대에서 지척인 알록달록 색채 마을로 이어진다. 고유의 색을 통해 부산을 표현한 마을. 배수구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디자인적 재미를 더한 풍경은 그 자체로 하나의 미술관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여기서 우산 지붕 계단을 지나 골목을 돌아 나가다 보면 어느새 보수동 책방 골목이다. 부산이 임시수도이던 시절 함경북도에서 피난 온 한 부부가 처음으로 헌 잡지 등을 내다 팔면서 자연스레 만들어졌다는 공간, 지식과 배움의 냄새가 있다면 바로 이 골목에 짙게 배어 있는 향기가 아닐까. 철이 지나 수명을 다한 것 같은 책들은 이곳에서 다시 새로운 에너지를 얻고 또 한 번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헌책만이 가치를 얻는 특별한 골목은 버려진 것들에 대한 재발견으로 오늘도 활기를 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