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큐레이션 | 여행준비 | Visit Busan 釜山広域市

묘지 비석을 품은 동네 아미동 비석문화마을

과거와 공존하는 특이한 방법

평점 5.0
조회 29,134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감천문화마을과 나란히 펼쳐지는 아미동 비석문화마을.
산복도로 르네상스 시대를 맞아 방문하는 관람객들로 분주해진 산동네 마을 중 하나이다.

6.25 전쟁 통에 가재도구만 짊어지고 무작정 나선 피난길. 부산역으로 자꾸 몰려드는 피난민들에게 공무원이 쥐어준 작은 쪽지에는 짧은 주소가 하나 적혀 있었다.
‘아미동 산19번지’, 앞으로 그들이 터를 잡고 살아가야 할 곳,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의 시작이었다.

일본인들의 공동묘지였던 아미동 산비탈 일대는 해방 후 그대로 방치되었다가, 부산으로 피난 온 사람들이 이 곳에 터를 잡게 되면서 주거지로 점차 바뀌게 되었다. 건축자재가 전무했던 시절, 묘지 위에 판자를 놓고 비석과 상석을 재료 삼아 집을 짓기 시작했다. 묘지 위에 집이라니, 지금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몸 하나 편히 뉠 공간도 없는데 무덤이 무슨 대수였을까. 바람 막아줄 기둥 하나 있다면 어디든 전쟁터보다 나았으리라. 집을 지으며 수습한 유골은 제를 지내고 근처 절에 모시기도 했다고 하니, 죽은 자에 대한 나름의 예는 갖춘 것이다.

아미동 일대의 계단이나 담장에는 당시 피난민들이 사용했던 비석들이 곳곳에 박혀 있다. 각진 상석이나 비석은 가파른 곳의 계단과 디딤돌로 쓰였고 또한 어느 집의 주춧돌과 옹벽으로도 사용되었다. 그 옛날 일본 전통가문의 문장이 그대로 남아있는 비석도 낮은 담벼락들 사이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골목마다 비석을 품은 집들이 아픔으로 다가와 마음 한편에 자리한다. 누구라도 어쩔 수 없었던 역사의 흔적, 그 깊이를 마주하니 저절로 숙연해진다. 비석을 찾아 헤매다 만나는 골목벽화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불러오고 골목사이로 보이는 시원한 전망은 방문객의 힘든 발걸음을 쉬어가게도 한다. 그야말로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는 마을이다.

과거는 현재로 이어지고 현재는 과거를 기억한다. 보따리 이고 지고 남쪽으로 피란행렬 따라 내려온 길, 그 길은 비석문화마을에 고단한 삶의 흔적을 남겼고 현재의 우리는 그 길을 다시 걷는다. 어느 삶인들 소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 온 삶은 그저 놀랍고 신비롭고 아름다울 따름이다.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은 조용히 거닐며 마을 구석구석을 알아가는 여정이 좋다. 미처 헤아리지 못한 부산의 역사를 현장에서 바로 마주하는 느낌을 받는다. 부산의 여느 원도심 여행지와는 다르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특별한 자극을 주는 비석문화마을이다.